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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코뮌과 바리케이트.

by 김베드로 2025. 3. 17.

3월18일 내일은 파리코뮌이 시작되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파리코뮌과 바리케이트

1. 서론

파리코뮌(Paris Commune)은 1871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짧지만 강렬한 사회주의적 혁명 정부였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직후,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불만 속에서 파리 노동자와 시민들이 봉기하여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 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바리케이트의 구축이었다. 파리의 거리 곳곳에서 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쌓아 정부군의 진압에 맞섰고, 이는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본 글에서는 파리코뮌의 배경, 전개 과정, 바리케이트의 역할 및 그 의미에 대해 상세히 탐구하고자 한다.

2. 파리코뮌의 배경
2.1. 정치적 배경: 제2제정의 붕괴와 제3공화국의 위기
 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나폴레옹 3세의 몰락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독일 통일을 추진하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의 대립 속에서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870년 9월 세당 전투(Bataille de Sedan)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 패배로 제2제정(Second Empire)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Third Republic)이 수립되었다.
 2) 제3공화국 정부의 위기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공화주의자들이 프랑스 제3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이들은 전쟁을 지속할 능력이 없었다.
레옹 강베타(Léon Gambetta) 가 지도하는 임시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군사적 열세로 인해 프로이센과의 협상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프로이센군이 1871년 1월 파리를 포위하자, 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2.2. 군사적 배경: 프로이센과의 항복 및 베르사유 조약
 1) 파리 포위전과 시민의 분노
1870년 9월부터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하고 4개월간(1870.9~1871.1) 봉쇄하였다.
시민들은 식량 부족과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저항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1871년 1월 프로이센과 항복 협상을 진행하였다.
 2) 베르사유 조약과 국민의 실망
1871년 1월 28일,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휴전 협정(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스 국민, 특히 애국심이 강한 파리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정부의 항복에 대해 격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2.3. 사회·경제적 배경: 노동자 계급의 분노
1) 빈곤과 실업 증가
1860~70년대 프랑스는 산업화가 진행되었지만, 경제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식량 가격이 급등하였다.
파리에서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과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2) 반(反)정부 감정과 노동자 조직화
프랑스 노동자 계급은 정부의 무능과 친부르주아 정책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
1864년에는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First International)가 조직되었고, 사회주의와 노동조합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정부가 아닌 노동자가 직접 운영하는 정치 체제를 원했다.
2.4. 국민방위대와 시민군의 반발
1) 국민방위대와 정부 간의 대립
국민방위대(Garde nationale)는 본래 파리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 조직으로, 파리 방어를 위해 무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정부는 전쟁 후 국민방위대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으나, 시민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3. 파리코뮌의 전개
3.1 1871년 3월 18일: 혁명의 시작

1871년 3월 18일, 티에르 정부는 파리 방위에 사용된 대포를 회수하려 하였으나, 파리 시민들과 국민방위대가 이에 반발하여 정부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정부군은 철수하였고, 파리는 사실상 시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노동자와 혁명 세력이 주축이 되어 파리코뮌을 선언하고 자치 정부를 구성하였다.
3.2 파리코뮌의 정책과 개혁
파리코뮌은 노동자 계급의 권리를 강화하고 민주적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경제 개혁: 노동자의 권익 보호, 야간 노동 폐지, 공장 노동자의 자치 운영 추진
정치 개혁: 시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 강화, 공직자의 소환제 도입
사회 개혁: 교육의 무료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사회 복지 강화
이러한 개혁 정책은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환영받았으나, 프랑스 정부와 유럽의 보수 세력에게는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4. 바리케이트와 혁명의 상징
4.1 바리케이트의 역사적 기원

"바리케이트(Barricade)"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barricade'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barrique(바리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Barrique(바리크): 프랑스어로 '나무통, 배럴(Barrel)'을 의미합니다.
Barricade(바리케이드): '나무통을 이용하여 길을 막는 구조물'이라는 뜻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 단어는 도시 내에서 봉기가 발생했을 때, 시민들이 통이나 나무로 길을 차단하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특히 1588년 프랑스의 '파리의 바리케이드의 날(Journée des Barricades)'에서 시민들이 통(barriques)과 마차 등을 이용하여 왕의 군대에 맞서 싸운 사건이 바리케이드라는 용어를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리케이트는 혁명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19세기 프랑스 혁명(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과 1871년 **파리 코뮌(Paris Commune)**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4.2 바리케이트의 구축과 역할
파리코뮌 기간 동안 시민들은 정부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바리케이트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소재: 돌, 나무, 마차, 철제 구조물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 사용
위치: 주요 도로와 광장에 설치되어 방어선을 형성함
전략적 기능: 정부군의 이동을 방해하고, 코뮌군의 전술적 방어 기지 역할 수행
바리케이트는 단순한 방어 수단이 아니라,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중심으로 단결하였고, 이를 통해 혁명 정신을 고취시켰다.
4.3 바리케이트 전투와 정부군의 탄압
1871년 5월, 티에르 정부는 프로이센과 협력하여 파리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다. 정부군은 베르사유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하였다. 바리케이트를 지키던 코뮌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무장력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였다.
정부군은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일주일"(La Semaine Sanglante) 동안 코뮌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수천 명이 사망하였으며, 수만 명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파리는 다시 정부군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바리케이트는 철거되었다.

5. 파리코뮌과 바리케이트의 역사적 의미
5.1 파리코뮌의 유산
파리코뮌은 72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되었지만, 노동자 계급의 자주적 정치 실험으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혁명적 정치 이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혁명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5.2 바리케이트의 상징성
바리케이트는 단순한 방어 수단을 넘어,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의 혁명과 시위에서도 바리케이트는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권력에 맞서는 민중의 집단적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 요소로 남았다.

6. 결론
파리코뮌은 현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 바리케이트는 혁명 과정에서 전략적 방어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단결과 저항을 상징하는 강력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비록 코뮌은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지만, 그 정신은 이후의 혁명과 사회 운동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파리코뮌과 바리케이트의 역사는 억압에 맞선 민중의 힘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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